Prodigal Son (Korean)

예수는 죄인과 세금 징수원 무리 앞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재미있는 우화를 이야기하였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우화는 전통적으로 사순절 세 번째 토요일 미사에서 읽힌다. 이야기는 두 아들을 가진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둘째 아들은 유산의 분배를 요구하고 먼 곳으로 떠나지만 “방종한 삶”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돼지 목동으로서의 삶도 외줄 타듯 산 둘째 아들은 그러한 삶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아버지는 “죽었다 살아난 아들을 위하여, 잃어 버렸다 다시 찾은 내 아들을 위하여”란 마음으로 자식의 귀향을 환영하는 잔치를 호화스럽게 연다. 성경에서처럼 이야기가 아버지의 관점이 아닌 아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되어 진다면 “나는 어떻게 자라 어떻게 현명해졌나”, “이기심과 허영심, 욕심에서 시작 된 인생 여정이 감사와 겸손, 순종에 도달하기까지”라는 계고적 이야기쯤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는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얻은 새로운 깨달음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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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캐나다에 내린 1975년 봄, 이제 막 캐나다는 댐 짓는 설치동물 비버를 이 땅의 공식적 상징물로서 지정했고 CN타워는 완공되었으나 아직 대중들에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수상은 피에르 엘리오트 트루디아우였으며 6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태어났던 날 쯤, 피에르 정부는 두 개 언어를 공식적으로 상용하기로 하는 ‘공식 언어 법령’을 제정한다. 이 법령은 영어와 프랑스어 외 다른 언어는 2급으로 분류함을 내용으로 한다. 피에르 정부는 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쟁들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으나 이민자들의 모국어에 관한 시각에서 보자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끔 하는 조치였다.
영어란 것과 만난 첫번 째 순간은 우리 가족이 캐나다에 발을 딪기도 전에 일어났다. 태평양 3만 피트 상공에서 내 방광이 SOS를 외쳤다. 놀스웨스트 에어라인 승무원이 나를 화장실로 안내했다. 파란색 물이 쥐똥만큼 담겨있어 신기하게 생긴 변기에 앉아 볼 일을 보고 승무원이 일러준대로 또 신기하게 생긴 레버를 눌러 내렸다. 그러자 변기가 한 마리 괴물같은 거머리처럼 ‘히익’ 소리를 내며 벌어진 입 속으로 공기를 빨아 들였다. 꼭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뿜어져 나왔고 화장실 구석에 움츠려 소리를 지르자 승무원이 문을 벌컥 열고 나를 안아 주었다. 그녀는 내 귀에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삭여주었다. 그러나 그 억양은 내게 안정을 찾아 주었고 부드러운 소리같은 따뜻한 후광에 둘러진 느낌이었다. 분명한건, 그 승무원은 제3세계 나라의 어느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의 호들갑을 다루는데 익숙하다는 것이었으며 그런 아이의 변기 사용 능력은 땅에 파진 구멍에 쭈그리고 앉아 볼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내가 홀딱 빠졌던 것이 그 승무원이었는지 아니면 승무원이 내뱉은 말이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래저래 뒤죽박죽된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른 많은 이들처럼 이 사랑의 사건은 일찍 실험대에 올려진 것이다. 새로 발견한 내 열정은 새로운 집, 캐나다로 가는 여정의 마지막 길에서 겨우 만들어진 것이다.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스탑오버 하는 동안 가족들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다. 우리는 우리보다 몇달 전 먼저 도착해 미 대륙에 잘 내렸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아버지에게 전화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고 있었다. 어머니는 당시 갓난 아기였던 남동생을 한 팔로 안고 네 살난 여동생을 다른 한 쪽으로 꽉 붙들고 공항을 두리번 거렸다. 나는 이유식과 무거운 기저귀 가방을 어깨에 들처메고 그 셋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깔깔대는 아이들이 몰려있는 군중 속에 빨간 코에 다채색이 가발을 쓰고 펄럭이는 신발을 신은 광대들이 나타나 우리 앞을 펄쩍펄쩍 뛰며 지나갔다. 나는 광대들이 코너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문득 나는 사람들 다리와 여행가방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가족들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이리저리 몇 발자국 돌아다녀봤지만 같은 자리만 빙빙 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내 방향으로 걷고 있는 백인 노 부부에게 다가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간결한 한국말로 나는 가족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부부는 서로를 쳐다보더니 다시 멍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남편은 “저 쪽”이라는 몹시 포괄적 방향을 일러주고 부부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코너로 사라졌다. 노 부부가 알려준 방향으로 내가 찾고 있는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내 안의 모든 삶이 내게서 떠난 것 같은 기분으로 과감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아주 지칠 대로 지쳤 있었다. 대기실에서 빈 의자를 하나 발견하고 다시는 어머니와 남매들을 볼 수 없다는 간헐적으로 폭발하는 공포를 억누르다가 깊은 잠에 빠졌다.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낯선 흑인 한 명과 백인 한 명 때문에 잠을 깼다. 그 둘은 회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으며 백인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내 팔을 흔들었다. 한 단어가 막연하게 내 이름처럼 들렸다. 여러 개의 음절과 자음 모양으로 된 그 말을 반복하고 반복했다. 소리는 부드럽게 들리지 않았고 모든 단어는 들쭉날쭉한 날만 섰을 뿐 내게 어떤 의미도 없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그 둘은 나를 아랫층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뜨거운 백열등이 빛나고 있는 사무실 쇼파에서 어머니는 잠들어 있는 남동생과 여동생 사이에 꽂꽂이 앉아 계셨고 이내 멈춰있던 내 마음은 환호로 가득해졌다. 나를 보자 어머니의 눈은 안심과 격분으로 빛이 났다. 머리 뒤로 울려퍼지던 내 몸을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는 미국에 우리 가족이 그렇게 본의 아니게 잠시 머물게 된 동안의 기억이 되었다. 그렇게 시기 적절치 못한 나의 호기심은 토론토 행 연결 비행기편을 놓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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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9월 세인트 티모시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이는 나의 기독교 생활의 시작을 여는 것이었다. 그 후 4년 동안 수호 성인인 세인트 케빈, 세인트 엔서니, 캐네디언 마터즈, 세인트 윌프레드의 이름을 딴 네 곳의 학교를 다녔다. 이 때는 막연한 동경심 덕택에 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되던 불안함을 잊고 살았다. 세인트 티모티 학교에서의 첫 번째 일주일이 끝나갈 때쯤 험프리 선생님은 여름 방학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왔다. 나는 무엇에 동의하는가는 상관없이 예의바르게 고개만 끄덕였다. 선생님은 교실 앞으로 나를 몰아 정면으로 학생들과 마주하게 한 뒤 그저 나만 두고 자리를 비켰다. 연이어 교실을 휘감은 침묵 가운데 나는 그저 뒤에서 가만히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거대한 칠판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붉은 볼의 둥근 눈을 가진 6살짜리 아이들이 눈 하나 깜짝 않고 나를 응시했다. 나는 원하지 않게도 반 친구들의 관심을 잘 집중시켰다. 그들은 희안한 이름을 가진 이상한 내가 공룡과 요정, 유니콘이 살고 있는 곳으로 자신들을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나보다. 피가 뇌로 솟구치는 것 같은 느낌에 콧구멍으로 바람까지 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가장 먼저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한국어였다. 물 밖으로 튀어나와 퍼덕이는 물고기 마냥 교실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말을 멈췄다. 처음에는 교실 뒤에서 낄낄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다음에는 교실 전체가 웃음 바다가 되었다. 선생님은 자를 들어 책상을 몇번 탁탁 치면서 조용히 하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제외한 교실 전체가 웃음 소리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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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과 카톨릭 기도문이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두 가지 모두 ‘나의’라는 단수형보다 복수형 소유격 ‘ 우리의’란 단어를 더 애용하며 1인칭은 종종 생략해 말한다. “나는 미사에 참례한다”라는 간단한 말조차도 한국인과 독실한 카톨릭신자들에게는 어색하고 꺼림칙하게 들린다. 그들에게는 “우리는 미사에 참례한다” 혹은 “우리가 미사에 참례했다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속 후련한 말하기 방식이다. ‘우리’를 가지고 ‘나’를 대신 했다는 것은 높은 무의식 상태를 반영한다. 인간은 돼지 목동이나 죄인보다 왕이나 신과 더 가까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거의 문장을 “나”로 시작하지 않는다. 여름 방학 동안 “나는” 이걸 했다, “나는” 저걸 했다는 이야기를 얼빠진 청중들 앞에서 말하느니 차라리 커다란 칠판 뒤로 사라져 버리고 싶을 것이다. 영어와의 최초 대면은 내가 세상과 나눴던, 이르긴 했지만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게 해주었던 언어를 못 쓰게 만드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는 나를 험난한 길로 등 떠밀었고 자기애와 더불어 외로움까지 선사해주었다. 비록 비종교 공립학교에서 우리 가족의 유목적 생존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이는 내 인생에 자리잡을 불길한 징조, 즉 부모님과 나 사이에 드리워진 두꺼운 유리 벽같은 언어의 장벽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영어와 살아가기 위한 투쟁같은 시간의 마지막쯤에는 더 이상 내게 자연스럽지도 친근하지도 않은 모국어와 단호하게 작별을 고했다. 이런 나의 결정은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당신 자식이 부모와의 소통 방법을 포기했다는 결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 주길 바라는 희망사항을 피어나게 했지만 나는 돌아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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